바로가기 메뉴
본문내용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서브메뉴 바로가기
바로가기
맨위로 이동
Home > 고객센터 > 여행후기

여행후기

제목 단재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 3 인천 국제항 대련행 대인호에 몸을실고
작성자 송태호 작성일 2009-11-02 13:31:00
2. 인천국제항 대련행 대인호에 몸을 실고

30명의 답사단이 되여 버린 답사대가 인천항에 도착하니 늦은 점심이다.
에니콜 여행사의 박성진 군과 인천항 도착 전화통화를 하고 점심을 후딱 먹는다. 처음 보는 박 군의 모습이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반가운 것은 백두산을 함께 인솔한다는 동지감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행사를 꼭 해내야 한다는 말을 전하고 기념사진을 한 장, 이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을 터이니 많이 찍어두자.
수속 후, 16시승선, 시간이 다되어 가자 짐이 가득한 짐수레들이 밀려들어온다. 대련 항은 화물 수송이 많다더니 대합실이 짐으로 꽉 차버린다. 보따리장수들의 행렬로 분비는 인천항이 되여 버렸고 길게 늘어선 줄 사이에 있다보니 어느새 대인호로 밀려 들어간다. 항상 부지런히 움직이시는 어머니가 앞장을 서있다. 2층으로 되여 있는 여객선 침대칸에 짐을 쑤셔놓고 갑판으로 달려간다.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가는 배의 후미에서 수평선 너머로 기울고 있는 해를 붙잡아 보려 하나 낮은 구름 탓으로 붉은 기운만 수평선위로 감돌고, 점점이 떠있는 섬들만 섬섬히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이 인천항은 어둠 속으로 멀리 시선 너머로 사라져 간다.
뱃전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 어슴프레한 바다 위를 날아 따라오는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간다. 1910년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조국을 떠나는 단재선생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불같고, 칼날 같은 임의 심성으로 떠나가는 뱃전에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이 보이는 것 같다. 단재선생은 4월 달에 안 창호 선생등과 마포나루를 거처 황해를 건너는 망명길에 오르나 심한풍랑으로 결국은 되돌아가고 육로를 통하여 러시아의 연해주지방에 독립운동의 깃발을 내려 꼽는다. 다만 안타까운 조국의 현실을 비통함 속에 바라보며 뱃전에 기대여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떠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허공을 응시하며 물어본다.
“우리는 무엇을 얻어 올 수 있을 것인가?”
여객실 침대칸을 돌아보니 어머니는 피곤하신지 철학관 집 아주머니와 일찍 주무시고 다들 휴게실로 갑판위로 왔다 갔다 하며 오랜만에 맛보는 바다 냄새와 뱃길여행을 느껴보기 위하여 나름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역시 젊은 신흥 팀들은 휴게실을 여유 있게 이용하며 카드놀이에 즐겁고, 대전 문화해설 팀 들은 객실이 조용할까봐 시원한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한겨울 같지 않은 겨울 바다 위를 대인호는 소리 없이 달빛아래 반사되는 물결을 뒤로 남기며 서쪽으로 서족으로 달려간다.
한 잔의 맥주에 대전 김 준태 씨와 정 지성 국장 셋이서 단재선생이야기, 고구려 유적과 역사, 백두산과 만주벌판, 대련의 여순감옥과 독립운동이야기로 토론의장이 되고 있다. 오랜만에 흥분되는 분위기이고 이것이 5박6일 동안의 답사길 내용이기도 하다. 모든 분위기가 비행기 여행에서 맛보지 못하는 여유로움이라 뱃길 여행의 참맛이 살아나는 것 같다. 이번 뱃길은 왕복 32시간에 달하는 긴 항로여서 지루함보다 오히려 일정 중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 되고 있다.
평소에도 자정을 넘겨 잠자리에 들지만 여행길에서는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침대를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니 옆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휴게실도 조용하다고 편안한 시간 단재선생의 생애를 돌아보며 메모하여온 내용들을 살펴본다.


단재선생의 연보
1880년 12월8일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에서 부친 신광식, 모친 밀양박씨 사 이 출생
1887년 부37세 별세 본향인 충북 청원군 귀래리 고두미로 이사 조부서당에서 한학수학
95년 풍양 조씨와 혼인, 96년 묵정리 신병휴(신백우의부친)에게 한학을 배우다.
97년 학부대신 신기선의 천안 목천 서재에서 공부, 98년 성균관입교 독립협회운동에
참여 투옥
1901년 가덕 인차리 신규식과 문동학교설립, 03년 항일 성토문 작성 친일매국 대신들 규탄
05년 2월 합시에 합격 성균관 박사가 됨, 산동학당 개설, 장지연의초빙 황성신문 논설
위원에 위촉
06년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황성신문 폐간, 양기탁의 청으로 대한매일신보 주필
07년 항일 비밀결사대 신민회조직 참가, 08년 을지문덕, 일본의삼대충노, 이순신전 연재
10년 20세기 신국민 등을 발표, 4월 안창호등과 망명길에 오르다. 러시아 연해주
11년 불라디보스톡에서 윤세복 이동휘 이갑등과 광복회조직 대양보 권업신문에서 활동
13년 신규식의 부름 상하이로 이동 14년 고구려 땅과 유적답사시작 고구려사관을 갖다
15년 북경 조선상고사 집필 신한청년회 결성 박은식 문일평 등과 박달학원 설립
18년 북경 보타암에서 조선사 집필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기고
19년 임시정부수립 의정원 의원(충북)에 피선 신대한동맹단 대동청년단 결성 신대한 창간
20년 만주지역 무장독립단체 통일 주비회 조직, 북경에서 박자혜 여사와 결혼
21년 북경에서 순한문잡지 천고 창간, 이승만이 위임통치 청원을 규탄하는 성토문 발표
22년 의열단 행동강령 조선혁명선언을 작성 발표, 24년 조선 고대문자와 시가의 변천
기고
25년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 27년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28년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발표,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 사건에 연루 대만 지룽항에서 5월8일 체포 ,대련 지방법원 형사법정
치안유지법 위반 유가증권 사기위조 등으로 재판에 회부
30년 대련법정에서 10년형 선고 여순감옥에 수감되다.
31년 조선일보에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 연재 기고
32년 건강 악화로 친일인사의 보증 조건부 병보석 제안 거절
1936년 2월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다.
2원23일 여순에서 화장을 하여 다음날 오후 유해를 서울로 옮기다. 각계유지 가족 과 친지들의 애도 속에 청주로 운구 묵정리 신 백우 선생 댁에 하루 봉안후 귀래리
고두미마을 옛집 터에 암장하다.
56세의 길지 않은 세월을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고 온몸으로 부들부들 떨며 싸우다 간 한인물의 생애가 눈에 들어 올 듯하나 아직도 나는 단재의 그림자를 겨우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새벽이 멀지 않았는데 짧은 꿈속에서 그이를 볼 수 있을까?
로그인을 하셔야 작성이 가능합니다.